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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지행의 세상읽기 -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추락한다
의문을 멈추지 않는한 지속적으로 되물어야 한다

2018. 02.09. 00:00:00

천변을 따라서 운전하던 필자의 눈에 멀리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며칠 전 내린 하얀 눈에 덮인 무등산이 멀리서 보는 내게 엄중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산 얼굴과 그 정수리에는 맑고 차가운 흰 정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치의 빈틈을 허하지 않았다. 쓸쓸하나 도도해 보였다.

도시로 내려뜨린 산의 손들은 타락한 어둠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그 정결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무등산은, 그 어떤 것, 그 누구에도 허락하지 않은 채, 오직 '태양 빛'만 무등(無等)의 산이 노니는 침대 곁에 다소곳이 머물게 했다.

어둠이 오면 간혹 '달빛'에게도 푸르스름한 떨림 속에서 그 영광을 허했다.

흰 눈을 담고 있는 무등산은 마치 광주 시민의 삶의 과정이 따라야 할 차가운 척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습하고 타락한 도시의 심장부에서 반성 없는 삶을 살았던 한국 검사들의 숨겨진 이면이 용기있는 사람들의 힘든 결단에 의해서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소위 한국의 극소수 엘리트라는 신분의 검사 집단의 - 물론 몇몇 남자 검사들이라고 한정해야 하겠지만 - 감추고 싶은 자화상이 끌어올려지고 있다.

언급되는 검사들은 그들이 쥔 권력을 배경으로 숨겨진 욕망을 거친 말과 손질로 표현했다.

그들은 주변에서 본대로 따라서 행동했다. 자신의 말과 태도에 대한 자기반성이 없었다. 관행이라 말했고, 조직의 문화라는 이름으로 치장하면서 그 유치한 행동을 지속했다. 그 결과 많은 피해 여성검사들은 자신들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굴곡진 삶을 살아야했다.

이 문맥에서 필자는 반성하는 소크라테스와 반성 없는 한국의 검사들의 모습이 대립적으로 연상되어 겹쳤다. 어떤 사람들은 말이 안 되는 비교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삶은 질문하는 것이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는 길이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 길을 찾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 말은 누구나 자기가 사는 길을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길을 찾기 위해서 나름 노력했다. 그가 찾은 한 방법은 '무지의 지'(知)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따라서 사람은 사는 동안 이를 극복해야 한다.

무지를 극복하고자 한 소크라테스는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담론했다. 그는 현실과 관행에 안주하려는 대화 상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람들이 신에 대하여, 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사유하도록 역설적으로 지적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익숙하지 않은 질문을 받은 일반 사람들은 불안했다. 그리고 그가 불편했다.

소크라테스는 현대적 의미로 공개적 장소에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도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왜 그렇게 손을 아래로 내미는가?'라든가, '왜 그런 말을 마구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끊임 없이 질문했고 참가자들의 관심을 유발하여 논의하고 토론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나서지도 않았으며 삶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어떤 멋진 해결책을 제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특이한 점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생각도 의문의 대상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는 일상에서 자신이 가진 습관적 생각과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명한 것도 의문시했으며, 이것을 대화 상대에게도 전달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람다운 삶을 위한 물음이고 질문이었지 대답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은 항상 잠정적일 뿐 질문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질문은 항상 남아 있고, 우리의 개별적 삶은 각각의 개별적 삶의 과정 안에서 그 질문에 대하여 응답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남겨준 것이다.



안주하는 사람은 추락한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사람은 항상 의문시하고 질문하는 존재여야 한다. 자신을 포함한 주변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고, 자신의 힘을 필요한 곳에 행사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순간 잠정적인 대답에 대하여 만족할 수 있지만 이내 또 다시 되물어야 한다.

1차적인 앎에서 생겨나는 의문을 다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의 대답을 통하여 새로운 질문의 다리로 넘어간다. 새로운 다리로 넘어가는 일은 이전의 토대를 헐어야만 가능하다.

이렇게 우리의 지식은 잠정적으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간다. 그 목표에는 완전하고 완벽한 의미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물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하는 물음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문을 멈추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되물어야 한다. 만약 더 이상 묻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고, 더 이상의 의혹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묻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의문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조직문화나 관행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편히 안주하면서 자신의 생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거나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람으로서 사는 게 아닌 셈이다.

그러므로 삶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고 의문시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어느 한 부분에 집중하여 몰입하게 되어 그 외의 다른 영역에서 보내는 시그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모두 지나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매우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머리가 자신의 익숙한 신념과 이념을 근거로 심장, 배 그리고 손의 소리를 듣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강행하려고 하면 세상의 그 어떤 폭력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위의 모든 요소들에게도 해당한다. 심장, 배 그리고 손이 각각 자신만의 능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게 되면 한쪽으로 경도된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자신의 손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라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도처에서, 사람의 삶은 반성적이어야 한다.

인간은 반성하며 자신의 길을 찾는 계몽의 길을 걸어왔다.

오늘날 누구도 더 이상 주어진 전통적 선입견에 만족하려 하지 않는다. 의혹이 있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도 않는다. 검토되지 않은 것을 진리라고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종교나 도덕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달라졌다.

사람들은 일부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제시하는 가치들에 대하여 의혹의 눈길을 보낼 정도의 힘들을 갖게 되었다. 인류의 유산인 계몽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판단 능력을 더욱 고양시킬 것을 요구한다.스스로 생각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다. 비판과 반성 없이 흐름의 경향성에 만족하려는 삶의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한다. 큰 물줄기 안에서 안주하려는 삶은 언제든 빗나가 추락할 수 있다.

인간은, 이제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하는 능력과 태도를 통해서만, 자신이 알고 있는 한줌 아주 조그만 것일지라도 외부의 무수한 맹목적인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반성의 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자! 쓸쓸하나 고고한 자리를 향하여. 박해용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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