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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7. 나의 사랑 아그마쉐네벨리(상)

입력 2020.03.05. 17:13
불빛의 영혼들이 취해 흔들리며 떠도는 거리
‘떠나온 고향’

거리를 오가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집집마다 달려있는 창문이었다

비록 페인트가 벗겨지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지만 창틀 모양이 제각각 다르면서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 풍경을 발견하면 창문 앞에 서서

그들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마치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마냥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나의 사랑 아그마쉐네벨리

마르자니쉬빌리 자하철 역 앞

시들어 바랜 장미꽃 움켜진 주름 깊은 사내

꽃 사달라 길을 막는다.

창백한 시간들을 뒤로하고

붉은 꽃 가슴에 장착한다.

밤이 되면 깨어나는 이국의 거리 아그마쉐네벨리

와인에 젖어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

불빛의 영혼들이 취해 흔들리며 떠도는 거리

진홍빛 홍등은 산산히 깨져 거리에 흩어진다.

말 없이 피어대는 러시아 여인의 담배연기

눈부신 금발을 적신다.

금발이 외로움에 얼어붙는다.

소리죽여 요동치는 색채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불빛들

숨 죽여 노래하는 아그마쉐네벨리의 시인들

거리를 감싸 흐르는 쿠라강은 어디로 흐르는지

강변을 떠도는 아그마쉐네벨리의 쓸쓸한 영혼

아! 그 거리의 눈빛으로

오늘 이 거리에서 지금은 떠나온 거리를 걷는다. (한희원)

트빌리시는 므뜨끄바리강을 중심으로 3구역으로 나눠진다. 관광객이 주로 찾는 올드타운과 아파트와 대학이 밀집한 북쪽의 신시가지. 그리고 강 건너 남쪽에는 구시가지가 자리한다. 내 숙소가 있는 자바하시빌리는 오랫동안 삭힌 음식 같은 정겨움이 묻어나는 곳이다. 멀고 먼 이국의 거리이지만 가까운 벗과 함께 걷는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든다. 이곳은 러시아시대 때 변두리 지역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었다. 궁핍한 철도 노동자였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도 이곳에 정착해서 살았다.

나는 정갈하게 잘 조성된 신시가지보다 이곳이 더 좋다. 먼지 묻은 좁은 거리와 오랫동안 방치되어 누렇게 변한 건물 외벽, 녹슨 철문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남루한 옷차림의 트빌리시 사람들까지도 마음에 든다. 며칠씩 머리를 감지 않아 휑한 몰골의 내가 스스럼없이 어우러져 살기에 안성맞춤인 동네이다.

이 거리를 오가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집집마다 달려있는 창문이었다. 비록 페인트가 벗겨지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지만 창틀 모양이 제각각 다르면서도 무척 아름다웠다. 때로는 고양이나 개가 창틀에 앉아 물끄러미 밖을 내려다보고 있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꽃을 화병에 꽂아 창문 앞에 놓아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풍경을 발견하면 창문 앞에 서서 그들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마치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마냥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창문 옆에 철제로 된 대문들의 아름다움은 더 했다. 이 동네에서 똑같은 모양의 대문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붉은 벽돌과 회색빛 페인트 그리고 나무와 철제로 꾸며진 트빌리시 구시가지의 모습에서 때로는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조지아인들은 물질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예술을 사랑하고 뛰어난 미적 감각도 가지고 있다. 가게나 집안에 자기만의 독특한 꾸밈이 있어 카페나 레스토랑을 들어 가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길을 걷다가 철제 대문 사이로 언뜻 보이는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와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와서 나를 둘러쌓았다. 여행객 차림도 아닌 허름한 옷차림의 동양인 사내가 자신들의 집을 찍으니 수상하게 여긴 것이다. 나는 황급히 아티스트라고 말하며 핸드폰에 저장된 내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사내들은 그림을 보는 순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그림으로 소통하는 시간이었다.

조지아인들은 그림과 음악을 좋아하며 사랑한다. 많은 레스토랑에는 조율이 안 된 피아노가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피아노를 치며 즐긴다. 또 그림을 들여다보며 진심으로 감탄하며 행복해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곳이 바로 조지아다.

또 언젠가 자바하시빌리에서 낡은 쇠 창틀 너머에 그림들이 걸려있어 용기를 내어 들어갔다. 작고 허름한 가게 안에는 수십 점의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이런 변두리에 화랑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보통 그림을 사고파는 화랑은 예술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에 있기 마련인데, 이런 퇴락한 거리 한 귀퉁이에 화랑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화랑에 걸린 수십 점의 많은 그림 중 몇 점은 정말 아름다웠다. 우리들과는 다른 생소함이 느껴지고 묘한 긴장감과 함께 매혹적이었다. 화랑 여주인은 세련된 점박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림 사이로 기품 있게 앉아 있는 모습이 방금 화가가 그린 그림 속에서 나온 것 같은 포즈였다. 하지만 표정은 동양인을 대할 때 나오는 특유의 무표정이어서 슬펐다. 그림을 사지 않을 사람으로 단번에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림 가격은 우리 돈의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까지 다양했다. 조지아 화폐단위로는 큰 액수이다. 나중에야 이 거리에는 화가들의 아틀리에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우연히 알게 되어 수없이 걷게 된 아그마쉐네벨리 거리가 이 근처에 있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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