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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담양 면앙정

입력 2021.04.15. 16:36
권력의 2인자를 ‘개’라고 꾸짖은 가사문학의 거장, 송순

송순(宋純, 1493~1582)은 다복한 선비였다. 조선 9대 성종(24년) 대에 태어나 14대 선조(15년) 때 졸했으니, 임금 여섯을 거친 그의 향년은 90세였다. 당시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두 사람 몫의 생애를 산 것이다. 담양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27세에 대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첫 발을 디뎌, 77세 의정부우참찬으로 은퇴할 때까지 부침은 있었으되 50년을 관료로 봉직했으니 이 또한 근 두 사람 몫의 벼슬살이에 해당할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의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은퇴 후에 찾아온다. 87세에 열린 회방연. 조선시대 장수한 관원에게 잔치를 열어주는 회갑(回甲)‧회근(回巹)‧회방(回榜)의 3대 경사가 있었다. 회갑은 출생 60년, 회근은 혼인 60년, 회방은 과거급제 60년이다. 회방연의 영광을 누리려면 과거급제는 당연지사이고 급제 이후 60년 넘게 살아야 하며, 잔치를 주관할 출중한 제자가 있어야 한다. 회방연의 주인공은 송순이 처음이고 조선시대 통틀어 4명만이 그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1579년 회방연을 ‘담양부지(潭陽府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송순이 급제한 지 회갑이 되던 날 면앙정에서 축하 잔치가 베풀어졌다. 마치 친은일(親恩日) 같아서 호남 온 고을이 흠모하여 구경하였다. 술자리가 반쯤 이르렀을 때 수찬 정철이 말하기를 “이 늙은이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대나무 가마를 메도 좋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정철은 헌납 고경명, 교리 기대승, 정언 임제와 함께 송순을 태운 대나무 가마를 메고 내려왔다. 그 뒤를 각 고을 수령과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따랐다. 모두 감탄하며 부러워하였다.’(기대승은 1572년 세상을 떠났으니 기록의 오류임) 

송순은 사후에도 이름이 높다. 그 시대로부터 400여년이 흐른 지금의 담양 가사문학면, 멀리 무등산의 북쪽 자락을 조망하고 서편으로 광주호가 앉아 산자수명한 이 동네에 ‘한국가사문학관’이 서 있다. 좌우로 소쇄원·식영정·환벽당 등 이름난 누정이 즐비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소쇄 양산보, 하서 김인후 등 16세기 호남가단을 형성했던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빙 두른 한 가운데 송순은 여전히 좌장으로 앉아있다.  

『서경』의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오복 가운데 부가 좀 덜할까, 빠지는 것이 없다. 오복은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하늘의 영역이 있어 사람이 애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때가 두 차례 반정이 일어나고, 사화당쟁이 피를 부르는 광풍의 시대였으니…. 


송순의 환로(宦路)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519년 10월 별시문과에 급제, 출사했지만 한 달 뒤에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첨예한 대립 속에서 벼슬길 3년 만인 30세에 모함을 받아 파직, 낙향한다. 1533년(41세), 정유삼흉(丁酉三凶)인 권간(權奸) 김안로가 권세를 잡고 국정을 농단하자 탄핵에 나섰다가 또다시 파직된다. 그때 귀향하여 지은 것이 ‘면앙정(俛仰亭)’이다. ‘굽어보면 땅이요(俛有地)/ 우러르면 하늘이라(仰有天)/ 그 가운데 정자를 앉혔으니(亭其中)/ 호연지기 절로 일어나네(興浩然)…’ 그의 「면앙정삼언가」가 그것이다. 4년 뒤인 1537년 김안로가 문정왕후 폐위를 기도하다가 사사되자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로 조정에 복귀한다. 송순은 50세 되던 1542년 외척이자 권신인 윤원형을 정면으로 공박하다가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당했다. 을사사화 3년 전이다. 그 무렵 송순은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이때 외가의 아우인 양산보와 조선 제일의 정원, ‘소쇄원’ 중수하는 일을 도왔다. 소윤이 대윤을 숙청한 을사사화 이후 외척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그 와중에 송순은 “윤원형과 진복창이 개와 매가 되어 사림을 물어 죽였으니 끝까지 복록을 누릴 수 있겠는가”라고 추상같은 직언을 내뱉으며 윤원형 일파와 끝까지 대립했다. 57세인 1550년 사악한 당파를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구수담과의 친분을 이유로 연좌 처벌되어 송순은 평안도 순천에 유배된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처형당하고, 명종을 이어 선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사림의 시대’가 개화한다. 송순은 대사헌으로 복귀하여 요직을 두루 거친 뒤 77세가 되는 1569년 칭병하여 50년의 관직을 은퇴하고 면앙정으로 돌아온다. 


시조는 3장6구 45자 내외의 운문으로 정제된 형식을 갖고 있다. 사유와 서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기에 불편했다. 그래서 하나는 지키고(음수율) 하나는 풀어버리는(작품의 길이) 가사(歌辭)가 등장했다. 가사를 ‘4·4조 4음보의 연속체 시가’라고 정의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이런 3행의 시조에서 리듬은 살리되 흐름은 놓아버리니, 「성산별곡」은 84행에 이른다. 운문과 산문, 시와 소설의 중간 형태다. 

‘인간을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쐬려 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까. 아침이 부족한데 저녁이 싫겠는가. 오늘이 부족하니 내일이라 여유가 있을까.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보니 번거로운 마음에 버릴 일이 아주 없다. 쉴 사이 없거든 소식 전할 틈이 있으랴. 다만 푸른 지팡이만 무디어져 가는구나.’

송순의 「면앙정가」,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 유명한 대목이다.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내용적으로 산수의 아름다움과 이를 유상하는 즐거움, 그리고 호연지기를 유감없이 표현하였고, 형식적으로는 어사(語辭)가 청완하고 유창하다’고 격찬한 가사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가사는 정극인의 「상춘곡」에서 시작되어 송순의 「면앙정가」에서 꽃이 피고, 정철의 「성산별곡」에서 숲을 이룬다. 면앙정은 광풍의 시대를 등지고 강호로 돌아온 가객들, 임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소세양 윤두수 양산보 노진 등이 ‘호남가단’을 형성하면서 ‘자유시’(가사)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울분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16세기 우리문학의 산실이었다.   


송순을 송순답게 한 것은 무엇일까? 세상살이가 양시론과 줄타기, 모사와 술수로 쉬이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세월의 어느 모서리엔가 걸려 반드시 넘어지고 만다. 향년 90세, 환로 50년, 문학의 좌장, 이런 삶의 높은 경지는 ‘일이관지(一以貫之)’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왈,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 그것을 기억하는 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자공이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아닙니까?”하니, 공자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하나로써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자공이 “평생을 두고 행할만한 한 마디 말이 있겠습니까?”하니, 공자가 말했다.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공자의 일이관지는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 ‘서’였다. 송순은 논어의 이 대목을 평생의 실천덕목으로 삼지 않았을까, 그의 일이관지는 ‘관용(寬容)’이었다. 관용은 ‘서’, 즉 ‘용서’다. 관용은 타인을 향해 승자가 베푸는 시혜의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의 원한과 고통을 스스로 다 감내해낸 뒤에야 나올 수 있는 철저한 자기 수양의 언어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다’ 하고, 큰 아들의 이름을 해관(海寬), 둘째아들 이름을 해용(海容)으로 관용을 한자씩 넣어 지은 것을 보면 살면서 얼마나 그것을 다잡으려 했는지 짐작이 간다.(오복은 있되 만복은 없듯이, 송순은 생전에 해관·해용 두 아들을 앞세우는 ‘상명지통(喪明之痛)’을 겪게 된다.)

 

그 관용과 더불어 송순의 삶에서 경외로운 부분은 시비곡직의 엄격함이다. 송순은 두 차례 당대 권력의 제2인자에게 정면 도전했다. 하나가 훈구파 권간 김안로이고, 또 하나가 외척 권간 윤원형이다. 누가 감히 시퍼런 권력의 제2인자를 ‘개’라고 꾸짖을 수 있겠는가. 환로에 서서 김안로를 때린 뒤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다가 그가 사사되자 다시 환로에 서고, 이번에는 윤원형을 때린 뒤 귀향하여 면앙정을 중수하다가 그가 처형되자 다시 환로에 서는 송순. 늙은 제자들이 팔순의 스승을 위해 대나무 가마를 멘 것은 그의 벼슬이 높고 뛰어난 시인이어서가 아니라, 선비로서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그의 시비(是非)와 진퇴(進退)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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