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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 광주천 유감

@유지호 입력 2023.03.24. 17:23

무등산은 '어머니 품'과 같은 산이다. 영겁의 세월을 묵묵히 지켰다.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역사도 말없이 감싸 안았다. 동서남북 어디에서 봐도 들녘에 솟은 달덩이처럼 넉넉하고 포근하다. 아파트를 선택할 때 서울의 한강처럼 조망권을 따질 정도다. 자연의 섭리. 생명이 움트는 3월엔 분주하다. 곡우와 입하 사이에 첫 순을 따는 춘설차는 무등의 생수를 머금으며 특별한 맛을 낸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광주·전남의 젖줄이 된다. 서쪽 계곡(샘골)은 광주천의 발원지가 되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화순 동복댐에 모인다. 도시는 무등산의 물, 즉 광주천을 따라 번성했다. 조선시대 땐 건천이라 불렸다. "본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무등산 서쪽 산록에서 나와 서북으로 흘러 칠천으로 흘러들어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대동여지도'에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광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민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물줄기였다. 시내를 동에서 서로 23㎞ 가량 휘돌아 적신 뒤 영산강으로 흘러들었다. 굴곡진 역사와 스토리 만큼 이름도 많다. 비단처럼 곱게 흐른다는 뜻에서 금계라 불렸다. 동구 금동이란 지명이 여기서 나왔다. 조탄이라고도 했다. 대추여울이란 의미다. 서천이라 불렸는데, 광주읍성의 서문(황금동 일대) 밖을 흐르는 개천이란 뜻이었다. 사연있는 인물·동네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시민들의 쉼터였다. 강폭은 제법 넓었는데 둔치가 넓게 펼쳐져 사람들이 모이기에 좋았다. 물을 타고 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제방을 놓고 만든 곳이 광천동이다. 지금의 이름은 일제 식민지배 잔재다. '큰 고을의 이름을 따르라'는 조선총독부 지침에 의해서다. 향토사학자 박선홍 선생은 '광주 1백년'에서 "제방을 쌓기 이전엔 꼬불꼬불 99곡을 이루었으며 강폭은 지금의 5배도 더 넘었다. 추석이나 정월 보름이면 강변 백사장에서 줄다리기를 했고 불놀이, 농악놀이 등의 민속잔치가 펼쳐졌다"고 했다.

옛 모습이 사라진 광주천의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역대급 가뭄이 원인으로 꼽힌다. 주암댐과 영산강에서 끌어오던 하천 유지용수 공급이 줄면서 바닥이 드러났다. 가라 앉았던 오염 물질과 쓰레기가 떠오르면서 악취가 코를 찌른다. 천변을 따라 걷기 조차 불편하다. 며칠 전엔 물고기 20여마리가 떼죽음 당했다. 물 부족으로 수질이 나빠지면서 용존산소가 부족해진 탓이다. 물고기가 살 수 없으면 사람도 살 수 없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유지호 부국장대우 겸 뉴스룸센터장 hwaone@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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